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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려 현종과 거란의 2차, 3차 침입과 초조대장경

by 아이비ivy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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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고려 제8대 대왕으로, 태조 신성대왕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 왕욱의 아들로 나말여초의 난세를 종식하고 통일을 이룩한 태조의 증손자입니다. 현종은 사생아 출신 군주로, 어린 시절에는 전쟁의 여파로 가족과 함께 힘든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거란의 침공을 두 차례 이겨냄으로써 고려의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여 생애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나라 안팎으로 다양한 위난을 평정하고 여러 제도를 강화하며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물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현종의 통치 기간은 고려의 번영과 발전의 중요한 시기로, 그 후의 고려 왕실도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는 현종 이후 제17대 인종 때까지 130년 이상의 긴 황금기를 이룩하게 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강성한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현종의 통치는 고려 왕조의 중흥을 지주하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2차 침입

1010년(현종 1년) 요나라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 배경에는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이 있었습니다.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서북면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숙청하고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양원군 왕순을 옹립하여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이 강조의 정변을 요나라는 구실로 삼아 4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의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막아 고려와 거란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거란은 흥화진을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규의 항전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30만 군을 이끌고 통주에 나가 막으려 했지만 큰 패배를 당하고 요나라 성종은 강조를 요나라로 붙잡아 가서 죽였습니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이 제기되었지만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 함락만 서둘러 했기 때문에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은 그대로 두고 내려왔고 병참선이 차단되었습니다. 이에 요나라는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해오자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용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중에 구주 등에서 고려의 양규와 김숙흥 등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당하였고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였습니다.

 

 

1011년(현종 2년)거란의 3차 침입

1011년(현종 2년)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와 거란에 대한 친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며 거란과의 국교를 끊어 버렸습니다. 이후 거란은 소배압을 선두로 내세워 대대적인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과 강민첨을 각 상원수와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비했습니다. 전투는 흥화진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는 기병 1만여 명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냇물을 굵은 밧줄로 막아 두었다가 적군이 다가오자 막았던 물을 일제히 내려보내어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큰 피해를 당한 상태에서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공격을 피해 개경으로 나가던 중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거란군의 소배압은 개경에 도달했으나 함락하기 힘들다는 판단으로 곧장 퇴각하였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결전을 벌이고, 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둡니다. 귀주대첩에서 거란군 10만 명 중 2천여 명만이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1011년 초조대장경

1011년에 거란에 의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점령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고려는 이런 국난 상황에서 불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을 통합하고자 대장경을 판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려가 대장경을 만들게 된 배경 중 하나는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점령하고 고려 왕이 피난을 가야 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거란 군이 스스로 물러가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장경은 거란의 주도로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는 일종의 구원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규보의 기록에 따르면 현종과 신하들은 대장경을 새겨놓을 때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다고 생각하며 이를 간절한 기도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불교가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할 때 중요한 도구로 여겨진 것입니다. 대장경은 불교의 경전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를 통해 불교적인 지식을 국민에게 확산시키고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려는 북송에서 들어온 개보장에 영향을 받아 대장경을 판각했으며, 이는 한문을 읽고 쓰는 학문적 역량이 높고 인쇄술이 발달한 고려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장경은 종이에 찍어내기 용이하며 내구성이 뛰어난 장점이 있어 불교 경전의 유통량을 크게 높였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불교 지식의 총체를 갖게 되었으며, 불교 교리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와 학문적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대장경 조성은 불교적 지식의 확대뿐만 아니라 후에 대각국사 의천이 교장을 조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의천은 송나라 유학길에서 중국과 일본 등에서 역대 주석서를 수집하여 돌아와 이를 소장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수집된 문헌들을 모아 목판으로 조성한 것이 속장경이며, 이 역시 동아시아 불교학의 선두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려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불교 교리를 심화시키며 동아시아 불교학의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현화사

현화사는 고려 제8대 현종이 1018년에 창건한 사찰로, 현종이 부모 안종과 효숙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입니다. 안종은 태조의 아들이었고 효숙태후는 현종의 어머니로 성종의 누이이자 헌정왕후였습니다. 현종은 안종과 헌정왕후의 사통으로 인해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안종과 함께 사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안종이 사망하자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자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정변이 일어납니다. 이에 현종은 태조의 현손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부모에 대한 효심과 고려 왕실의 출생에 따라 겪은 어려움과 억압을 해소하고자 한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1021년에는 현화사에 비를 건립하여 현종의 효심과 사찰의 위용을 높였습니다. 현화사 창건은 부모에 대한 애정과 국가적 위기 속에서 현종이 겪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찰 건립에 참여한 공신들은 현종을 추대한 추대 세력들로 구성되며 불사를 통해 국가적 위기에 대한 보상과 위로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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