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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만주 정복

by 아이비ivy 2023.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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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19대 광개토대왕은 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추모의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 직계가 아닌 왕계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의 적국인 백제를 항복시키고 서쪽의 후연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또한 북쪽 유목 민족들을 정벌하여 만주를 비롯한 넓은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고 말갈 등 유목 민족들을 휘하에 두어 북쪽 영토를 크게 확장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한국의 역사에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중요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의 군사 능력을 듣고 나갔으나 막지 못해 여러 부락이 함락되었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러 왔을 때는 광개토대왕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막았습니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 북방의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백제 진사왕이 사망하고 아신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을 회복하려 했습니다. 393년에는 아신왕이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전방으로 나가지만 치욕을 씻기 위한 도발이었기 때문에 이내 회군했습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공격을 관미성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는 고구려는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을 방비했습니다.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었으며 396년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통해 한강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 개의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백제 아신왕은 항복하여 영원한 노예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고 그의 동생과 백제 대신 십여 명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전쟁 과정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때에 거란의 침입으로 붙잡혀 갔던 1만여 명의 백성들은 되찾았습니다. 395년에는 염수로 진출하여 거란족을 정벌하고 복속시키면서 많은 소나 말 등을 획득하였습니다. 398년에는 동북 국경 지대에서 숙신을 정벌하여 지역을 안정시켰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다양한 군사 작전을 통해 국경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고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후연과도 치열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400년에 고구려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모용왕은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광개토대왕은 이에 보복하여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을 함락시켰고, 404년에도 후연을 정복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연군까지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중국 지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후연군을 격파하여 전리품을 획득하고 후연의 여러 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해 남연과 우호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연이 멸망하고 북연을 건국하자, 408년에는 우호 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외교와 군사적 업적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전략적 판단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 비석은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그리고 수묘인(묘지기)에 대한 기록, 이렇게 크게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이 비석은 만주 집안현(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석은 높이 6.39m인 정방형으로 각 면 외곽에 윤곽선을 그리고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했습니다. 글자의 크기는 11~16cm이며, 1880여 글자로 되어있습니다. 내용은 3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제1부는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 업적에 대한 칭송, 제2부는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며, 제3부는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 및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상으로는 광개토대왕의 능 근처에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정확한 능을 가리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388년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

399년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으나 백성들은 전쟁의 가혹성을 느끼고 징집을 피해 신라, 왜, 가야 등으로 도망가 군사력이 고갈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백제는 고구려에 복수를 노렸고 신라와의 관계 정리를 선행하기로 결정하고 왜가 백제를 도와 신라를 침공하며 가야도 함께 신라를 침략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광개토대왕은 평양에 행차 중이었고 신라는 군사적 도움을 청하면서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후연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했습니다. 그러나 모용성은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성과 남소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런 상황에서 보병과 기병 5만여 명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내었습니다. 고구려 군은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몰아내고 신라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연합군이 피해를 당하고 패퇴하자 광개토대왕은 이를 추격하여 임나가라(가야)까지 점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한동안 신라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404년에는 백제, 가야, 왜가 다시 침입하였고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지켜냈지만, 이후에도 백제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제압하고 고구려는 한반도에서의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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