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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내정개혁

by 아이비ivy 2023.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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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즉위 초반에 무신 정권을 혁파하고 반원 정책을 추진하여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는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한 세력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하는 등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에는 개혁 의지를 상실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년에는 남색과 향락에 빠져서 홍륜에 의해 시해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다재다능하여 그림과 서예에 능했습니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개혁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무신정권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 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곧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352년에 공민왕은 중요한 부서를 직접 챙기면서 친정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공민왕은 왕의 실권을 강화하고 중요한 통치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공민왕의 노력은 서연을 재개하여 원로와 사대부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경서,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하도록 권고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또 첨의사와 감찰사를 강조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백성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와 함께 공민왕은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부정행위를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고려 정부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정을 정화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무신 집권기를 거치면서

무신 집권기를 거치면서 대토지 소유 형태인 농장이 합법 및 불법적인 수단으로 발전하면서 사회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농장주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조세 부담을 회피하고, 농민들 또한 농장주에게 의존하여 세금을 피하는 경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이 파탄난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 기구가 설치되는 등의 노력이 벌어졌습니다. 노비제도와 관련하여도 활동하였는데 노비를 추쇄하는 등 노비제도의 정비를 담당했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사회경제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전민추정도감이 설치되고 신돈은 토지와 노비에 대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신돈의 실각으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이 점차 해체되었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토지 침탈과 재정 위기, 노비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개혁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의 유학자 중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특히 일부에서는 주목받는 활동으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단기간에 그쳤고,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특히 신돈의 사례에서 보듯이 전민변정도감은 당시 일반 민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일부 사안에 대한 단기적인 개혁으로 그쳤고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계가 뚜렷하던 이유 중 하나는 권력 구조와 기득권층의 저항, 정책의 제대로 된 지속성 부족 등이 있었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이 고려 후기의 재정 위기와 노비 문제 등에 대한 대응으로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한편, 한계와 한시적인 성격도 동시에 부각되었습니다. 이후의 조선시대에서도 농업, 재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개혁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더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350년부터 본격적

1350년부터 본격적으로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왜구 대부분은 일본 규슈 북부지역 출신으로, 일본 내란 기간의 기근으로 고통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으며, 초기에는 주로 남해안에서 곡물 수송선과 창고를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활동은 경기도 연안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때로는 백여 척의 해적선을 이끌고 나타나 내륙까지 침략하였습니다. 공민왕 시기에는 반원 정책을 펼치고 있었을 때라 왜구의 약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왜구의 활동으로 공민왕의 개혁 노력도 방해받았습니다. 1358년에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를 물리쳤지만, 그 이후 왜구의 약탈은 더욱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려군의 토벌 작전에 대한 거친 대응이 있었고, 왜구는 양민의 학살을 이어갔습니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물리친 후에야 고려는 왜구에 대비할 수 있었고 1364년에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왜구들은 해안경비가 소홀해진 중국 대륙으로 약탈의 중심을 옮기면서 한반도에 출몰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곧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민왕은 최영을 왜구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퇴치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약탈을 완전히 근절하지 못했고 왜구에 의한 피해는 계속되었습니다.

 

 

1268년에 몽골이 동여진을 경유

1258년에 몽골이 동여진을 경유하여 장성 이남을 침공하였습니다.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죽도로 피신하였으나 고려인으로서 투항한 조휘와 탁청 등이 그를 죽이고 몽골에 투항했습니다. 몽골은 새로 점령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해에 공민왕은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하였습니다. 유인우는 대호군과 함께 출정하여 조휘의 증손 조소생과 탁청의 후손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지만, 조휘의 친손자인 조돈과 이자춘, 이성계가 내부에서 협력하여 성공적으로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습니다. 조소생은 도망가고 유인우는 화주목을 설치하여 쌍성총관부의 지역을 수복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자춘은 동북병마사로 중앙으로 진출하고 조돈은 조소생을 몰아내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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