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목종이 원래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목종(왕인)이 너무 나이가 어려 성종이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성종은 자기 아들이 아닌 경종의 아들 왕송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왕이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지정하는 것이 보편이었던 시기에 비해 특이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자신의 봉호(봉호자)를 물려주는 형식으로 성종이 직접 왕위를 물러날 때 후계자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후계자로 자신의 가계가 아닌 외부의 인물을 선택하는 방식을 시도하였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당시의 고려 왕조가 직면한 여러 과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특히 불교계의 폐단, 사치 및 사회 문제 그리고 왕권과 관련된 문제에 중점을 두고 그것들에 대한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개혁 제안은 성공의 공감을 끌어내 국가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시무 28조에 대한 최승로의 제안을 충신 또는 민생을 신경 쓴 인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당대 백성들은 여러 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품었습니다. 특히 성종에게 올린 이 개혁안이 신하 우대와 불교 약화, 중앙 집권, 신분제 강화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신분제 강화는 현대의 시각에서도 그리고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전향적인 성향으로 평가되는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을 견제하려는 차원에서 신진 인사를 기용하고 귀화인 관료인 쌍기를 중용하는 등 귀화인 우대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귀족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약화하면서 노비 해방 정책과 함께 광종 치세의 핵심 정책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는 과거제를 도입하여 공정한 시험을 통해 신진을 선발하려 하였지만 비판과 지방 호족 출신 귀족들의 반발로 완벽한 변화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 귀족 출신인 최승로는 음서제를 강화하고 노비환천법을 건의하여 해방된 노비들과 그들의 예전 주인 간의 관계를 재정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노비환천법은 주인의 재량에 따라 결정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비판받으면서도 광종이 양민으로 신분을 회복시켜 준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전환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993년 제1차 거란의 침입
993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여진을 이끌고 고려에 대한 침입을 두 차례에 걸쳐 통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고려는 박양유와 서희를 포함한 지휘자들을 보내 침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10월에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실제로 고려를 침략하면서 고려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성종은 이에 직접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지만 봉산군이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등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고 조정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파견하여 내침의 진의를 타진하였습니다. 고려 내에서는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에 대한 의견이 갈렸습니다. "항복론"은 군사적인 대응이 아닌 항복을 통한 해결을 주장하였고, "할지론"은 어느 정도의 양해를 통해 국경을 재조정하여 평화를 이루는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을 제안했고 고려 조정은 서희를 급파하여 화친 제의에 응답했습니다. 이로써 군사적 대응과 외교적 노력을 병행하면서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어떻게 막을지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고려가 거란에 대한 저항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994년에 동여진을 몰아내고 새로운 행정 구역인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흥화진, 통주, 구주, 곽주, 용주 그리고 철주로 구성된 강동 6주는 고려의 동쪽 지방을 안정시키고 확장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로써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대신 요(거란)와 교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고려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비공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강동 6주의 확보로 인해 동쪽 지방에서의 영토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형식적으로 고려에 대한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 목적을 달성했지만 실제로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중단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송나라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에 대한 압박에서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고려 전기 고려의 군대
고려 전기에는 고려의 군대가 중앙 정부와 지방 호족 간에 이원화되어 있었습니다. 정종 때 거란의 침략을 계기로 광군이 만들어져 대규모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노역에 종사하는 노동부대로 군사적으로는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도 지방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을 때 광군은 노역만을 담당하는 부대로 남았습니다. 고려는 중앙군인 '경군'과 지방군인 '광군'으로 군대를 구분했습니다. 경군은 개경과 주변 지역에 주둔하였습니다. 국왕이 직접 통제하는 중앙군은 2군 6위 체제로 조직되었고 각 군은 편제의 상하로 나뉘었습니다. 지방군은 각 지역과 국경에 주둔하며 국왕이 임명한 관리가 통솔하는 주현군과 주진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편제는 고려 군대의 향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중앙군 2군 6위의 총병력은 편제사 45,000명으로 평상시에는 이보다 적을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특히 2군 6위의 인적 구성은 군반씨족제설과 부병제설이 대립하며 최근에는 양자를 절충한 '경, 외군 혼성제설'이 학계에서 지지받고 있습니다. 외군인 주현군과 주진군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았지만 성종은 이에 대한 절충안으로 절도사를 제정하여 지방 호족의 사병들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고려 초기 국가 조직
고려 초기에는 태조가 신라 및 태봉의 제도를 섞어 만든 6 관제를 사용하였습니다. 광평성, 내의성, 내봉성이 있었고 내봉성 밑에 6관이 설치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은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로 대체하였습니다. 이 체제는 중추원, 중서문하성 양부 체제로 계승되어 나중에는 원 간섭기의 시작인 충렬왕 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성종은 기존의 광평성과 내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중서문하성은 당제에서 중서성과 문하성이 최고 기관이었는데 성종은 이 둘을 합쳐 내사문하성(이후 중서문하성)으로 개편하여 중서문하성을 최고 기관으로 설정했습니다. 또한 상서성을 새로 설치하여 내봉성을 대체하였고 상서 6부로 나뉘어 형부, 이부, 병부, 공부, 예부, 호부 등으로 업무를 나누어 전문성을 강화했습니다. 한언공의 지원을 받아 성종은 중추원을 설립했습니다. 중추원은 '추부'로 불리며 중서문하성은 '재부'라는 별칭을 받아 양부로 묶여 고려의 최고 정부 기관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중추원은 초기에는 숙위 직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임금의 구두 명령을 전달하고 국방에 대해 의논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관등과 신분제인 골품제가 사라지면서 고려는 새로운 관등이 필요했습니다. 태조는 신라와 태봉의 품계를 가져와 고려만의 품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품계는 9품 16등위로 총 16단계로 구성되었고 문관과 무관에 상관없이 모든 관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 품계는 명칭이 없었지만 성종 초반까지 정식 관작의 품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종은 후에 북송의 품계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문관의 문산계와 무관의 무산계로 나뉘어 적용되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영향과 북송의 문치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려는 15품을 만들어 총 15단계의 품계를 설정하였고 성종 대에는 문산계 품계가 도입되어 원 간섭기에 들어서는 충렬왕 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방 제도
고려 초기에는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지 고려는 기존 신라의 지방 제도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제6대 성종은 중앙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지방 호족의 독립성을 억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이 개혁으로 인해 지방 제도에서 도와 목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성종이 도입한 지방제도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대표적인 행정 구조 중 하나인 '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도는 성종이 당나라의 당제를 참고하여 신라의 행정 구분에 맞추어 개조한 것으로 10개 도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도는 관내, 중원, 하남, 강남, 영남, 영동, 산남, 해양, 삭방, 패서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또한 성종은 10개 도 아래에 대도시를 선정하여 목 12곳을 두고 각 지방에 절도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는 군대의 재편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방관 체계는 조선 시대 지방관 체계보다는 단순하고 정교하지 않았습니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한 상황에서 지방관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행정력이 부족하여 징병이나 징세를 효율적으로 시행하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성종의 지방제도 개편은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후 현종이 이 제도를 바탕으로 5도 양계 제도를 완성하였고 성종의 도와 목 수준에서 시작된 지방제도 개혁이 현종 시대에는 군현까지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또한 동경이라는 개념도 도입되었는데 성종은 개경을 중심으로 향토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경을 설치하였습니다. 동경은 신라 세력을 우대하고 지방 세력을 안정시키는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변화는 고려 후기에도 계속되어 나중에는 원 간섭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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