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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려 태조 왕건의 업적과 생애

by 아이비ivy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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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성여왕에 왕건 부자

신라 진성여왕 9년(895년)에 왕건 부자는 이제 막 세력을 떨치던 궁예를 찾아가 송악을 바치고 그 신하가 되었습니다. 궁예의 밑으로 들어간 태조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여러 지역을 평정하였습니다.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 교전하여 나주를 점령함으로써 후백제 세력을 위축시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왕건은 궁예 다음으로 2인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궁예의 관심법으로 많은 호족들이 숙청당하였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 홍유 등은 일부 호족들과 함께 왕건을 황제로 세우고자 합니다. 왕건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궁예를 몰아내고 보위에 오르게 됩니다. 임금으로 추대된 태조는 자기 고향인 송악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여러 정책을 추진합니다. 궁예의 터전이었던 철원은 태조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들이 태조의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인 송악으로 수도를 이전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불안한 즉위 초반에는 지역 호족들을 회유하고 통합하고자 그 지역 호족의 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는 결혼 정책을 펼쳤습니다. 궁예의 부하로 태조에게 반발한 환선길의 반란과 이흔암의 반란 등이 발생하자 태조는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고 그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였습니다. 후백제와의 관계는 태조의 즉위 초반 태조의 즉위를 축하해 주기도 하였으나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으로 침략하였고 태조가 신라의 편을 들면서 후백제와의 관계는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태조가 후백제의 나주를 빼앗은 것을 거론하며 관계는 더욱더 악화하게 됩니다. 925년 거란에 멸망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하고 신리와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였습니다. 927년 후백제 견훤은 경주를 기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 김부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태조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왔지만 이미 경주는 함락된 이후였고 대구의 공산(현재 팔공산)에서 견훤 군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태조는 견훤에게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자 빠져나가기 위해 신숭겸이 태조의 모습으로 바꾸고 대신 군대를 지휘하였고 견훤 군에게 전사하였습니다. 태조는 신숭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였고 서둘러 개경으로 후퇴하였습니다(공산 전투). 이후 견훤 군의 침략으로 화가 난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호족들은 다시 태조에게 귀순하였고 또 발해가 멸망하여 그 유민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고려는 점점 인구가 증가하였습니다. 930년 다시 태조와 견훤을 대치하게 되었고 유금필의 활약으로 고창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고창 전투). 935년 후백제의 견훤은 자기의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힌 후 탈출하여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가게 됩니다. 태조는 견훤을 상부의 예로써 받아들이고 견훤과 함께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게 됩니다. 스스로 항복해 온 신라의 경순왕 또한 받아들여 평화롭게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의 군대는 후백제의 신검 군대를 일리천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고(선산 일리천 전투) 신검의 항복으로 후삼국이 완전히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삼국통일 이전부터 호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결혼 정책을 써왔고 통일 이후에도 결혼 정책을 유지하게 됩니다. 삼국의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것이 왕권 강화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계속 단결시키기 위해 결혼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태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함께 고려 건국에 힘썼던 장군들의 사병을 압류하였습니다. 삼국 통일을 이룬 태조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국호를 고려라 이름 지었습니다. 과거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서경을 중시하여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고자 하는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습니다.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을 공략하고 서북 면을 개척하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태조는 불교의 장려를 통해 단결을 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발해를 멸망하게 했던 거란은 고려 태조에게 화친의 선물로 낙타를 보내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이를 거절하고 낙타들을 만부교에 매어 놓고 굶겨 죽입니다(만부교 사건). 태조 사망 후에 후세 왕들을 위해 훈요 10조를 지어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왕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불교를 진흥시키고 비보 사찰을 건립하고 서열과 관계없이 황위를 계승하게 하고 거란을 배척하고 서경을 중시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가감하지 말고 백성들의 신망을 잃지 말고 변방 출신은 반란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벼슬을 내리지 말고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무예가 뛰어난 자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경전과 역사서를 읽고 정사에 임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태조는 민생안정의 일환으로 조세 감면을 해주는 취민 유도를 실시하였고 흑창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한 후에 돌려받게 하였습니다. 호족 통합 정책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개국공신들에 공로, 충성도, 인품을 고려하여 역분전을 지급하였습니다. 또한 향리 자제를 개경에 머물도록 하는 기인제도와 개국 공신이나 현직 중앙 관리들을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삼아 그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태조가 지방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결혼 정책까지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완전히 호족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결혼 정책으로 인한 세력들로 많은 반란이 생기는 어려움들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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