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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선 현종의 예송논쟁, 제도 정비

by 아이비ivy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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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대와 현종은 역사적으로는 그의 아버지인 효종과 아들인 숙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국왕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북벌론과 관련된 효종의 활동에 비해 예송논쟁 등으로 인한 현종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미흡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서인 중심의 붕당 정국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병자호란 이후에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2차 예송논쟁 당시에는 아버지 효종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서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예송논쟁 기간에는 서인들의 기세를 꺾어내는 데 성공했고, 거물들도 현종에게 군소리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예송논쟁 이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의 통치 시기가 상대적으로 짧았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업적이나 개성이 뚜렷하게 강조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기 동안에도 꽤 업적을 남겼습니다.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에게 남인은 빼앗겼던 정권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659년 효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후인 자의대비의 복상에 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논란이 시작된 배경에는 성리학이 도입된 이후 고려 후기부터 일반 사대부와 평민이 따르던 '주자가례' 그리고 성종 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에 대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주자가례'는 일반 사대부와 평민이 따르는 관혼상제의 사례로, 성종 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는 왕실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는 효종과 같이 차남이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그의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논란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이 강한 조선 시대에는 국가의 제도와 예법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러한 논의에서 발생한 갈등이 정치적인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해예송은 1659년에 효종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계모후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이 논쟁은 장남이 아닌 아들의 예에 따라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장남의 예로서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논쟁은 효종의 계승에 따라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상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인 송시열 등은 효종이 차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을 강조하며 기년복(1년)을 주장했고, 남인 허목과 윤휴 등은 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참최복(3년)을 주장했습니다. 논쟁은 각자의 입장을 주장하면서 서로 반박과 공격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송시열이 주장한 기년복(1년)이 채택되어 서인파의 입장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념 대립과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며, 예송을 둘러싼 논쟁은 더 큰 규모로 확대되고 복잡해졌습니다. 제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은 1674년에 발생한 예송으로, 효종의 비인 효숙왕대비가 사망하면서 발생한 논란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효종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서인파인 송시열과 김수향은 효종비가 차자의 부인이므로 자의대비는 대공복(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갑인예송에서는 남인파의 김우명과 김석주는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고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종은 기해년의 복제는 고례를 쓴 것이 아니라 국제를 쓴 것이라 주장하였고 남인이 주장한 기년복 설(1년)을 채택하였습니다. 결국 남인이 승리하게 되어 남인 중심의 정계가 재건되었고 서인들은 처분되거나 축출되었습니다.

 

 

현종은 재위 기간에 여러 정책을 펼쳐

현종은 재위 기간에 여러 정책을 펼쳐 조선의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명분론적 북벌론을 중단하고 군비 강화에 주력하면서, 예송논쟁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재정구조의 재건에도 노력했습니다. 현종은 호구 수의 증가를 위해 양민의 삭발과 입승을 금지하고 승려의 환속을 촉진하여 호구의 증가를 도모했습니다. 또한 산간지방의 유민을 단속하여 호적에 편성하고 범월인을 처벌하는 법을 정하면서 재정구조를 개선했습니다. 농업 발전을 위해 간개시설을 만들과 수리 면적을 늘렸습니다. 또한 양관을 각 도에 보내 관개시설을 점검하도록 하여 농업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호남대동청을 설치하여 조세체계를 정비했습니다. 경기도에 균전사를 설치하여 양전을 시행했습니다. 정족산성에 새로운 사고를 마련하여 등서한 역대 실록을 보관하고 교서관에서 활자를 주조하여 동활자를 완성했습니다. 또한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이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을 못하도록 규제를 실시했습니다. 현종은 양인 확보책으로 공사천인으로서 양처의 소생이 모역을 따르게 하여 합법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활자를 주조하여 대자와 소자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통해 현종은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를 발전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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