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으로, 광해군과 지지 세력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입니다. 그의 본명은 이종이며, 아버지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이었습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직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이후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인적, 물적 자원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따라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광해군은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광해군은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형, 동생, 조카 등을 죽이는 등 인륜을 해치는 행동을 하고 임해군이 사병을 키우고 역모를 꾀하지 죽인 일도 있습니다. 또한 계축옥사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폐시키는 등 혈연관계를 무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지나친 토목공사와 파견된 인사 등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하고 종묘를 중건한 것 외에도 인경궁, 경덕궁 등을 무리하게 건설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부역과 세금 문제로 민생을 힘들게 했습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파병하는 데 주저하고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보여 조선을 오랑캐와 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명과의 동맹을 해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이유로 반정 세력은 반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정 세력은 인조와 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반군은 궁궐을 장악하였고 도망친 광해군과 세자를 잡아냄으로써 반정이 성공하였습니다(1623년).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를 지목하여 그를 처형하고자 했지만, 인조와 반정 세력의 간청으로 광해군은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로 귀양보냈습니다. 그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북파 대부분이 처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반정을 주도한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함께 조정을 운영하였습니다. 인조는 대동법 실시 등의 국정 개혁을 하였고 광해군이 무리한 토목 공사 행위를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반정에 성공하여 공을 세운 공신세력이 보유하고 있던 군사를 동원해 토지와 백성을 불법적으로 침탈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외교 문제에서는 당시 국제 정세와 사상적 분위기를 고려하지 못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졌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에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에 내정과 외교에서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여 외교 정책을 펼쳐 국제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도원수 강홍립이 명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후금에 항복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후 광해군은 국경 경비에 신경을 쓰고 군비를 갖추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의 이러한 정책들을 버리고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점차 세력이 향상하던 후금의 신경을 건드리게 하였습니다. 반정 직후에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고(1624년) 곧 진압되었지만,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조선 침공을 부추기게 됩니다. 또 명나라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조선이 지원하였고 이 일이 후금을 자극하게 되어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침공하였습니다.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고 강화하였습니다(1627).
1636년 후금은 청으로
1636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조선은 당시 청과의 관계를 통해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강화조약을 통해 청과는 형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은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은 청의 기병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산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장기전을 준비하였으나 청은 압록강을 건넌 후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한양으로 남하하였습니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간 일을 기억하고 사전에 피난 가는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갔지만 급히 결정한 일이라 산성에서 항전하기 위한 군량 등이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 추운 겨울에 식량이 없어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인조는 봉림대군과 세자빈이 피난 간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항복 의식)를 행하여 항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청과는 군신관계를 맺고 명과는 단절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이로써 병자호란은 조선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고 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청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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