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으로, 군호는 봉림대군이었습니다. 그는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가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한 후에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직후 소현세자가 급사하면서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부왕 인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하였고 인조가 승하한 후 즉위하였습니다. 즉위 후 북벌을 추진하였으며, 대동법을 실시하고 민간의 광산개발 참여하는 설점수세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즉위한 지 10년 만에 과로로 인하여 진료를 받던 중 급작스럽게 사망하였습니다.
효종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효종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즉위 후에는 친청파를 몰아내고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서인들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김집 등 서인들은 북벌론을 이념적으로 지원하면서 효종의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이 북벌론은 조선 체제 붕괴 위기를 극복하고 대내적인 지배 안정책으로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김자점 등 친청 세력이 청나라와의 협조를 모색하면서 적극적인 군사 계획이 어려웠습니다. 1651년에는 청나라 섭정왕의 죽음이 북벌계획을 진행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조귀인옥사가 계기가 되어 김자점 등 친청파 세력은 상당수가 숙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북벌은 국가재조와 함께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론의 열기가 가라앉았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신하는 표면적으로 북벌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내심에서는 전쟁의 피해와 불확실한 승리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피해에 대한 경험을 감안할 때, 새로운 북벌 전쟁은 많은 사람이 회피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또한, 효종의 사망 이후에는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 논쟁이 두 차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적인 불안이 높아지고 북벌론을 주도하던 서인이 정권에서 밀려나면서 북벌론은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벌론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고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인 행동은 뒷걸음쳐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흑룡강 지역의 풍부한 자원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가 흑룡강 지역의 풍부한 자원에 관심을 갖고 흑룡강 하구에 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를 통해 모피 수집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이에 따라 인근 원주민들과의 분쟁 및 청나라 군사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가 활동 범위를 확대하자, 청은 군사를 파견하여 러시아인들을 공격하고 축출하려 했으나, 장비가 구식이었던 청나라 군대는 신식무기인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 대항하기 어려워 여러 차례 패배했습니다. 이에 조선에 조총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효종은 제안을 받아들여 조총군을 보냈고 청나라 군사와 함께 러시아군을 상대로 맹렬한 공격을 펼쳐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제1차 나선정벌). 하지만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다시 활동하였는데 청나라 군사는 그 활동을 저지하지 못하였고 또다시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조총군은 러시아군 정벌에 나서게 되었고 이들의 활동으로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습니다. 러시아군과의 두 차례 정벌에서 조선 군사는 용감하게 싸워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 군사는 러시아군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두 차례의 정벌은 효종이 즉위한 이후 준비해 온 북벌계획이 간접적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 결과로 평가되었습니다. 조선군의 사격술과 전술이 효과적으로 발휘되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해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군비 강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무신인 이완과 유혁연을 특채하여 군사 양성에 참여시키고 어영청을 개편하고 강화하여 북벌의 선봉 부대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금군의 기병 전환, 금군 내삼청 통합, 수어청 재강화 등의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강화를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실패도 있었는데, 훈련도감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실패하였습니다. 1654년에는 영장제를 강화하고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지방군인 속오군에 보인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군사학 강의를 위해 능마아청을 실시하고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군비 강화 정책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없고 효종이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이를 '막중한 일을 추진하면서 국제정치의 역학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허황된 목표를 가진 군사력'으로 평가했습니다.
효종은 두 차례 전쟁 후
효종은 두 차례 전쟁 후, 경제 재건에 힘을 썼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고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며 농민들이 파산하여 국가체제가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효종은 부세 제도의 개혁, 농업 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 등을 추진했습니다. 김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대동법의 실시 지역을 하였고, 전세를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습니다. 신속이 편찬한 '농가집성'을 간행하고 보급하여 농업생산에 활용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동철 수급 문제에 대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효종 시대의 경제적 안정과 회복에 일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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