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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숙종 시대, 붕당정치의 변질(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신환국)

by 아이비ivy 202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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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나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선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숙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남인과 서인 간의 당파 싸움이 격렬해진 시대를 지배했습니다. 그가 제2차 예송논쟁이 있었던 직후에 즉위한 뒤, 기년설을 주장하는 서인을 배척하고 남인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이 당시 명성왕후는 그의 어린 나이를 이유로 모후의 반대를 받았지만, 숙종은 친정을 시작하고 모후의 반대를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명성왕후는 후궁 희빈 장씨를 경계하고 추방하는 등의 조처를 했습니다. 이후 희빈 장씨는 명성왕후의 사망 이후에 환궁하며, 남인과 서인 간의 갈등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숙종의 재위 동안은 남인과 서인 간의 당파 싸움이 더욱 격화되어, 1680년 초부터는 서인 내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서로 강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당파 간의 대립이 더욱 심해져서, 어느 한 측이 상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환국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과 당파 간의 갈등은 조선을 통치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줬습니다.

 

 

 

숙종은 1680년 3월에

숙종은 1680년 3월에 허적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잔치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허적이 왕실의 물품인 유악을 무단으로 가져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숙종은 큰 불만을 품고 유혁연, 김만기, 신여철을 불러내어 급작스러운 인사 개편을 진행했습니다. 유혁연은 해임되고, 김만기는 훈련대장으로, 신여철은 총융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어서 숙종은 허적에게 사직을 권유하였고 허적은 결국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동시에 허적의 세력인 윤휴와 민암의 삭탈관작과 귀양을 건의하는 상소가 제기되었고, 숙종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4월에는 서인 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고, 삼복 형제와 남인들에 대해서도 유배와 삭탈관작의 처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인사 개편은 표면적으로는 허적의 왕실에 대한 태도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배경에는 숙종의 정치적 의지와 종친, 외척 세력 간의 균열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권 초기에 남인을 집권하던 허적 등을 경신환국으로 축출하고, 다시 서인을 재집권시켰습니다.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되었고, 다양한 정치적 변화와 권력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를 왕비로 맞이했지만, 그녀가 1680년에 사망하자 1681년에는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를 계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이때 궁중 나인이었던 장씨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성왕후에 의해 장씨를 궁 밖으로 쫓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하고 나서는 다시 궁중으로 돌아오며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와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 계열 출신이었고, 특히 장씨는 남인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은 역관 출신으로서 경신환국 당시에 복창군과 복선군 옥사에 연루되었던 인물로, 그의 관계가 남인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했습니다. 장씨의 부상은 서인계열의 불안을 가중했고, 특히 서인 노론계의 일부는 남인과의 연결을 우려하여 경계심을 표명했습니다. 숙종은 왕자를 낳은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키고 왕자를 원자로 빠르게 결정하려는 의향을 나타내면서 서인 계에 대한 불신과 대응을 강화했습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문과 관련된 사태를 통해 서인들을 강력히 대응하였습니다. 송시열은 왕자의 원자 결정이 이르다는 의견을 제기하며 숙종에게 상소하였으나, 이에 대해 숙종은 서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송시열을 외지로 출송시켰습니다. 이는 서인 계에 대한 숙종의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고, 서인들은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은 송시열의 사형으로 이어졌고, 숙종은 남인들을 중심으로 인사 개편을 진행하였습니다. 영의정 김수흥 등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고, 서인들을 파면하는 등의 조처를 했습니다. 이로써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숙종은 서인계에 대한 보복을 강력히 행동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에도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며, 남인들은 이 기회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남인이 전권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들게 되었고, 이를 위해 갑술환국이 일어났습니다. 1694년에는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폐비의 복위를 시도한 혐의로 국문을 받았습니다. 이 자제들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통해 폐비의 복위를 꾀하려고 하였고, 함이완의 고발로 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서인들을 연루시켜 큰 규모의 옥사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김인의 고발에 의해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서인들이 돈으로 꾀어내어 숙원 최 씨를 독살하려 하고 반역을 도모한 등의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에 숙종은 숙빈 최 씨에 대한 독살설과 남인의 반역 음모에 대한 고발을 듣고 심경이 변하였습니다. 숙종은 갑작스럽게 환국을 단행하고, 이로써 남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서인의 재집권을 꾀해 폐비 민 씨를 복위시키려는 음모가 있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일로 남인들은 처벌받고 서인들이 다시 기득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국은 남인과 서인 간의 권력 독점을 조절하려는 숙종의 의도를 나타내는 사건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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