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조선 제14대 국왕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닌 왕위를 계승한 서자 가문 출신의 왕이자,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계는 사림파에 의해 장악되었고 동서분당 사건으로 인해 사림파 내부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 아래에서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 아래에서 신료가 붕당을 형성하는 것이 범죄로 간주하였습니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신유학에서는 구양수와 주희 등에 의해 성리학 이념이 군자끼리 모여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군자당이라 불리는 계층 간의 당파정치가 제시되었습니다. 조선의 사림파들은 이러한 이념을 받아들이고 선조 시대까지 붕당 행위가 중범죄로 간주하였지만, 이를 발전적이면서도 당파 정치로 활용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삼았습니다. 이로써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붕당정치는 상호 비판과 견제라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에서는 과도한 양상을 띠면서 임진왜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무관보다는 문관의 인사 권한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특히 이조전랑은 중요한 요직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이조정랑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총칭하는 삼사의 여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삼사 관리의 추천 권한을 통해 대신들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었고 주요 인사권과 언론 권한이 정랑에게 집중되어 정랑직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관리 임명 권한은 삼정승이 아닌 이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조판서는 삼정승보다 큰 권한을 가졌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삼사 관리들이 독립적으로 감찰과 탄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습니다. 삼사에 대한 인사권을 대신들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삼사 관리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또 계급이 높은 관료에게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조정랑의 지위가 보장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조정랑직에 대한 인사권도 독립시켰습니다. 이처럼 이조정랑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청요직 중에서도 으뜸에 해당하는 중요한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대에 후임 이조정랑에 대한 신임 과정에서 정치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심충겸이 이 조직에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이를 반대한 김효원이 이발을 천거하여 이 조직에 취임시켰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김효원과 심충겸 사이의 개인적인 갈등과 이전의 사건들이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전 해에 심충겸의 형인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정랑 취임에 반대했던 사건이 그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에 따라 김효원과 심충겸 간의 갈등이 심화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지지자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사림들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노장 사림들 간에 갈등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에 위치하여 동인이라 불리고 도성 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심의겸은 서인이라 불렸습니다. 붕당 조짐이 나타나면서 이준경이 이이를 중심적 인물로 지적했습니다. 이에 이이는 처음에는 거칠게 반발했지만, 붕당이 현실로 나타나자 반성하고 붕당을 혁파하고 사림을 통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에 붕당이 현실로 나타남에 따라 선조는 대신들의 분열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림의 분열은 심해졌고 이이는 분란이 극렬해지자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파견하는 해결책을 제안했고 선조가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이의 건의에 따라 심의겸을 개성에, 김효원을 함경도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함경도는 개성에 비해 외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인을 우대하고 동인을 홀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동인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오히려 동인 세력을 유배 보내고 이이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습니다. 이로써 붕당을 반대한 이이의 의도와 달리, 그는 서인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이후에도 선조의 지지는 계속되었습니다. 동인 세력인 정인홍 등은 같은 동인 소속인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 삼아 동인 내부에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 동인들 사이에서 지도자로 여겨지는 인물이었습니다. 선조는 우성전의 처신에 크게 문제를 두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향후 기축옥사와 건저의 문제 이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이가 사망하면서 선조는 유배간 동인 세력을 풀어주고 이에 점차 조정은 동인의 세계로 변화해 갔습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여립이 자결하자 역모 의혹이 강화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인들은 정여립이 동인과 합세하여 서인을 비난하여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정권을 되찾을 기회로 판단하여 사건을 확대시켰습니다. 그에 대해 동인들은 서인들과 갈등을 격화시켰고 동인 중에 서인과 일조한 인물이 나타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어 동인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조는 동인 세력의 성장을 제압하기 위해 서인 소속인 정철이 동인을 처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철의 가혹한 처벌을 통해 수많은 동인이 희생되었고 서인이 다시 집권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어 동인과 서인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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