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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독립협회(1896)

by 아이비ivy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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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에 대한제국 내에서 설립된 협회로, 초기에는 사교 클럽 형식으로 출발하여 민중계몽 단체에서 발전해 민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근대적 정치 단체로 변모했습니다. 창립자인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 민중이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표로 했습니다. 독립협회는 각 지역에서 만민공동회와 협성회를 조직하여 국민들을 토론과 타협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과 결합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1898년 11월에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해산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나타나 민권, 참정권을 주장하며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중의 정치 참여, 내정개혁을 선언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서재필은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로 인해 1884년 국외로 망명한 뒤, 10년 만에 미국 시민이 되어 귀국했습니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 건립, 독립협회 조직 등의 활동을 통해 독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창간된 독립신문은 1896년 1월에 첫 호가 발행되었으며,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서재필과 유길준 등이 설립에 기여했습니다. 독립문 건립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사로 기획되었습니다.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한 운동을 촉구했습니다. 건립 자금은 정부 예산 외에도 국민으로부터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을 받아 왔습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이 열리고, 이후 1년간의 공사를 거쳐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조직하면서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독립협회는 당초에는 고급관료의 사교모임으로 시작했지만, 독립문 건립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에게는 회원 자격을 부여하여 국민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독립문 건립 이후 독립협회는 참여자들이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모여 국민 대표 기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창립 이후 1년이 지난 후부터는 계몽단체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유럽 순방을 마친 윤치호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계몽단체로의 전환을 제안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계몽적인 활동을 확장했습니다. 1897년 8월 8일 독립협회는 통상회를 개최하면서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토론회는 회원들에게 공중 연설을 훈련하고 회의 의사진행 방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8월 29일 첫 번째 토론회가 열렸고 이후 정기적으로 열리며 총 34회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주제는 처음에는 계몽적인 내용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인 주제로 변화해 갔습니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의 성격도 변화하면서 참여자들의 구성도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고급관료 층이 중심이었지만, 신지식층과 학생 단체의 참여가 증가하면서 조직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1898년 독립협회는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했고, 주요 이슈는 러시아의 대한제국에 대한 정책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공세에 반대하며 정부를 공격했고, 이로써 러시아의 정책이 보류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독립협회는 쟁점이 생길 때마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만민공동회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집회로, 독립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연단이 마련되어 여러 사람이 연설을 하며 토론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진행되었습니다. 민회는 가두 대중 집회로, 처음에는 가수 대에서 열렸으며 나중에는 경운궁의 대안문 앞으로 옮겨져 열렸습니다. 민회에서는 미리 준비된 연사뿐만 아니라 즉석에서 연설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말로 연설을 하는 만큼 글을 모르는 사람도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민회를 통해 정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1898년 독립협회가 대규모 민회를 개최하여 관민공동회 주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립협회는 헌의 6조를 제안하고 참석한 정부 대신들도 동의했습니다. 헌의 6조는 국정 운영에 백성들의 뜻을 반영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민회에서 국정 운영 방식까지 논의하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이전에 발생한 김홍륙독다사건 드의 사건들이 독립협회의 공세적인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수파 내각은 연좌법 등을 부활시키려 했고, 독립협회는 이에 맹렬히 반발하여 보수파 내각을 무너뜨리고 개혁파 내각을 수립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독립협회는 박정양 내각과 협상을 시작하고, 관민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받아들이는 등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보수파는 익명서 사건을 조장하여 독립협회의 회원들을 해임하고 체포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의회 설립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이후 중추원의 구성과 대신 후보 선출에서의 논란 등으로 인해 독립협회는 국정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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