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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by 아이비ivy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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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전신이자 망명정부로, 1919년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의 침탈과 식민 통치에 대항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이 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여러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나, 1919년 9월 11일에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원칙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7개의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설립되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 제정되어 9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 헌법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헌법은 국호를 '대한민국',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며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윤봉길을 지휘자로 삼아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중국국민당,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 법통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되었으며,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전국 및 국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립 국가 수립을 열망하며 국내외에서 독립 국가 건설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정부수립은 '임시정부'로 이어졌습니다. 국내에서는 조선공화국과 신한민국정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요 수립 지점이었고, 추가로 확인되지 않은 '전단 정부'도 있었습니다. 1910년 무형 국가론과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민국 건설이 주장되었으나 국가 수립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초기에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한 곳은 러시아 한인들을 총괄한 전로한족중앙총회로, 1919년 2월에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고 3월에 대한국민의회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국내에서는 3월 초에 한성정부가 임시정부를 선포하였고, 상해에서는 1919년 4월 10일에 29명의 대표자가 모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정부 조직과 내각을 선출하며 '임시헌장'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4월 11일 이후 상해의 임시의정원은 다양한 정부 조직과 통합을 결정하였고, 1919년 5월에 내무총장 안창호가 오면서 통합이 급진화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하며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했습니다. 통합 임시정부는 출발부터 순조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창범이 한성정부 개조에 반발하고 내각 취임을 거부했고, 무장투쟁 세력은 이승만의 위임통치를 비판하며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불완전한 형태로 통합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7부 1국 체제로 조직된 임시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안창호의 주도로 추진된 연통제와 교통국은 국내 행정을 장악하고 통신 연락 및 활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군사 활동 계획도 수립되어 군대 양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와 공군 창설 등이 추진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학교 폐교가 이뤄졌습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 비밀결사 조직과 연계하였고, 군무부 산하로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조직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은 재미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대한인국민회가 재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며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의 거점 조직은 발각되기 시작했고, 1920년에는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면서 활동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승리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은 1920년 말부터 감소하였습니다. 통합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에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활동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외교적인 활동으로 기대를 걸었지만,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위임통치 주장이 불안정한 외교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1921년에는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는 국민대표회의가 열려, 외교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정부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와 정부 해체 후 새로운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창조파로 인한 분열이 심해졌습니다. 이 논쟁에서 창조파는 국호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하였습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상실하고, 분열과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정부의 쇄신을 시도했습니다. 1925년에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1927년에는 국무위원제를 도입하여 지도 체제를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인사들이 취임하지 않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1927년에는 다시 국무위원제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194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26년에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로,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1927년에는 좌파 세력과 통합하여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 결성했고, 상해에서는 좌·우파가 합작하여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연합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노선 차이와 분열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세력들은 다양한 이념과 노선에 따라 여러 정당을 조직했습니다. 1930년에 김구와 조소앙 등은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중 간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자 특무조직을 통한 의열투쟁을 결정했습니다. 1931년 10월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왕 저격과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는 중요한 성과로 나타났지만, 임시정부는 이로 인한 추적을 피하기 위해 1932년에 상해를 떠나 유랑생활에 들어갔습니다. 1932년 5월 항주로 피신한 임시정부는 중국 내로 이동하며 여러 지역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해소하고 6개 단체를 통합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했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광복진선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인국민회, 대한인동지회 등을 통합하여 광복진선을 조직했습니다. 이후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추진했습니다. 민족혁명당은 좌익세력 이탈 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좌파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습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고, 1939년 8월 중국 사천성에서 한국 혁명운동 통일 7단체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이견으로 인해 일부 세력이 이탈하면서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했습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이 합당되면서 임시정부는 단일정당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에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0월에는 주석제로 국무위원제를 개헌하여 당·청·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틀 후 선전포고를 통해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 참여를 선언했습니다. 김원봉의 참여로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으로 돌아가고, 1942년 8월에는 선출된 좌익계열 인사 14명이 임시의정원에 입성했습니다. 1944년에는 주석·부주석 체제로 전환하여 의회와 정부를 좌우 연합정권으로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광복군은 대일항전과 국내진공작전을 목표로 했으며, 1943년 8월에는 영국군과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했습니다. 1945년 8월 10일, 임시정부는 독수리 작전을 추진하려다 중국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8월 18일에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환국을 결정, 9월 3일에는 정부 형태로 환국한 뒤,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인계하였습니다. 한교선무단을 통해 중국 내 한인 보호와 귀국을 도왔고, 건군 작업을 통해 광복군을 확대하며 국내진공작전을 모색했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임시정부는 주중대사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환국 직전 임시정부는 중국과 미국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중국은 적극 지원하고 편의를 제공했으나 미국은 승인하지 않아 귀국할 때 비행기 1대만 지원했습니다. 15명의 요인은 2진으로 나누어 귀국했고, 미군정이 환영인파에게 알리지 않아 환영도 없었습니다. 환국 직후 임시정부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무부 산하에 두었고,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비상 국민회의를 규합하여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의도로 인해 임시정부가 해체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후 비상 국민회의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했지만 실패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통합하여 국민의회로 개편되었습니다. 국민의회는 1947년 3월에 과도정권을 수립하였으나, 이승만이 불참하고 미군정의 반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1947년 들어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후 유엔이 한국 문제를 맡게 되었고, 총선거와 통일 정부 수립을 감독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유엔위원단은 남북 지도자 회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임시정부 세력은 이에 반대하며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유엔위원단의 결정에 따라 1948년 5월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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