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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by 아이비ivy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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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조선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친부로서 조선 말기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오랜 기간 실권을 가졌으며, 조선 말기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풍운아로 불리며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당대부터 현대까지의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대단히 다양하고 파란만장한 역정으로 가득 찼으며, 세도정치 시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인 주요 사건에 관여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1820년에 태어나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 구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이 출계되어 익종(효명세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어서 그는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습니다. 대원군은 조선시대에 국왕의 생부를 지칭하는 말로, 여러 대원군 중 하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과 영향력을 키우며 조선 말기의 정치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공식적인 권한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는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종친부의 관제 개정, 경복궁 중건과 같은 국정 사업에 관여하였습니다. 1865년에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면서 이 일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겼습니다. 또한, 조선 말기의 정치 상황에서 그는 국왕의 생부로서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말기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영향을 받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그가 대원군으로서 국정에 참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흥선대원군의 활동은 그 후의 한국 근현대사에도 영향을 미치며, 그가 한국 근현대사 교육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로 남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정치의 대표적인 과제로 삼은 것은 60년 동안 지속된 안동 김씨 세도 권력의 몰락이었습니다. 이 세도 권력이 무너진 배경에는 1862년에 발생한 임술 민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임술 민란은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하였으며, 이는 당시 조세 징수인 삼정이 불안정하게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정 문란은 특히 민란이 발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며, 세도정치라 불리는 조선의 비정상적인 정치 상태로 이어지는 국가체제의 이완이 본질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안동 김씨의 정치적 리더십은 이런 상황에서 흔들렸으며,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삼정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복원하며, 탕평인사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등 세도정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삼정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호포제와 사창제를 도입하여 이 문제에 대처했습니다. 호포제는 신분과 관계없이 군포를 균등하게 거두는 방식이고, 사창제는 환곡을 대신하여 민간에서 곡물을 대여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백성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나, 당시의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주로 '쇄국'이라는 용어로 언급되며, 이는 그가 대외적으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서양 여러 나라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외교적인 분쟁으로 이어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었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대외강경책을 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신미양요의 과정에서 전투와 동시에 외교적인 협상의 통로를 열어놓는 등 양면적인 대응을 택했습니다. 박규수와 같은 인물이 협상에 참여하며 현실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873년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시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권좌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수용하고 잠시 궁을 떠나 있었습니다. 이후 1882년 임오군란은 처음에는 군인들의 폭동으로 시작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개입으로 권력다툼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군란에서 벗어나 궁을 떠났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궁으로의 복귀를 요청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게 되었지만, 곧 청군에 납치되어 중국 보정부에 연금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894년 6월 21일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궁궐에 복귀했습니다. 이로써 다시 집권했지만, 일본군에 의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일본은 조선에 개화파를 요구하며 흥선대원군을 배제하려 했고, 흥선대원군은 반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에는 을미사변이 발생하며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했지만,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명을 낳았고, 1898년 2월 22일에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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