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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강화도령, 철종

by 아이비ivy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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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별명으로 '강화도령'이라 불리며,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냈습니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안동 김씨 세도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즉위했으나, 미약한 권력과 간섭으로 정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32세에 후사 없이 종신했으며, 조선왕조실록이 편찬된 마지막 국왕입니다.

 

 

1849년, 헌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가운데

1849년, 헌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가운데 즉위한 지 15년 만에 사망하자 철종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고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철종의 즉위는 두 가지 주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철종의 선대는 죄인으로 처벌받았던 사실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헌종의 대통을 이어 즉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철종은 어린 시절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지냈으며, 왕위 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왕실의 상황을 대표하는 사례였습니다. 이에 순원왕후는 후사로 철종을 선택하고 수렴청정을 실시했으며, 철종은 즉위를 위해 관례를 치르고 군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대와 즉위 과정은 여러 어려움과 문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철종의 즉위는 두 가지 주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철종의 선대는 죄인으로 처벌받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언군과 전계군은 그들의 부모가 정조대에 연루돼 사사 당한 사건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순조 원년인 1801년, 신유박해가 벌어진 때, 은언군의 부인 송 씨와 상계군 이담의 처인 신 씨는 그녀의 신앙으로 인해 사형되었습니다. 둘째로, 철종은 헌종의 대통을 이어 즉위하면서 정치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헌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사망했고, 이에 왕위 계승을 위한 후보자가 부족했습니다. 철종은 풍계군과 전계군 중에서 선택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은언군과 전계군의 아들로서 부모들의 어두운 역사로 인해 후보로서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원왕후는 철종을 선택하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그를 후사로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철종은 어려운 환경에서 왕위에 올라가게 되었지만, 그의 즉위는 여러 어려움과 문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 철종의 즉위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순원왕후는 다양한 조처를 했습니다. 먼저, 철종을 후사로 결정하고 은언군 내외의 작위를 복구하여 왕위 계승을 명확히 했습니다. 특히 철종의 아버지인 이광은 그간 군호를 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었는데, 순원왕후는 선조가 생부를 덕흥대원군으로 봉작한 예를 참고하여 전계대원군이라는 군호를 부여하고 이를 추상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851년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완료하자, 철종은 직접 정무를 보며 효를 바탕으로 순조, 순원왕후, 헌종, 익종, 사도세자와 영조에 대한 존숭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순원왕후의 승하 후에는 철종이 그녀를 위해 슬픔을 나타내며 친히 발인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1853년에는 철종이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 유현을 석실 서원에 제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1858년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에 대한 존호를 추상하여 신료들이 참여한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경과를 강조하며 안동 김씨를 대표로 하는 노론의 의리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조처는 순원왕후에 대한 고마움을 넘어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의리를 강화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했던 안동 김씨를 지원하는 측면이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철종 대에는 안동 김씨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순원왕후와 함께 다른 세력을 견제했습니다. 순원왕후는 수렴청정 도중 김씨 가문에 대립적이었던 조병현과 권돈인을 비롯한 일부 세력을 궁상에서 사사하고, 권돈인은 부당한 방법으로 인사에 압력을 가해 탄핵당하여 쫓겨났습니다. 그에 친분이 깊었던 김정희 역시 형제들과 함께 유배되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철종의 국혼 결정으로 외척의 지위를 다시 확보했으며,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와 관련된 인물들이 세력을 유지하고 정계에서 강세를 보였습니다. 철종은 1859년에 궁궐 수리를 명하면서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서궐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어덯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이에 관동지역의 갑주가미에서 충당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러한 궁궐 수리와 왕실 행사 등은 국가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862년에는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했는데,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임술 민란은 삼정의 문란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일어난 것으로, 백성들은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며 봉기에 나섰습니다. 철종은 왕의 권한을 행사하려 했지만,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의 영향력에 제약받았습니다. 민란이 일어나고 국가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안동 김씨 등의 세력은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면서 세도정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철종은 스스로 왕권을 강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겪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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