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는 1927년 창립된 대규모 항일 단체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한 조직입니다. 1931년 5월까지 활동하며 전국적으로 확장된 단체로 약 3~4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습니다. '민족유일당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슬로건으로 활동하였고, 민족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다양한 계층과 세력이 참여했습니다. 회원 중에는 주로 농민이 많았고, 1931년 5월에는 회원 중 절반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조직은 빠르게 확장되어 143개 지회와 2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에 주요 회원들이 검거되면서 내부적인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1931년 5월 '해소안'이 가결되면서 신간회는 해체되었습니다. 해체 이후 사회주의계는 합법적인 활동 무대를 상실했고, 국내에서는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1920년대 문화통치기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는 민족운동과 대중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언론과 단체들이 생겨나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다양한 계층에서 대중운동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정세 변동으로 인해 국내외 운동 세력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이념이 강조되었지만, 3·1 운동을 통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부 갈등과 대중 기반 상실로 인해 민족운동을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운동 세력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독립을 표방하는 대중조직을 만들거나 정치적 투쟁을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1925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결성과 동시에 해체되었고, 1926년 6·10 만세운동 이후 대대적인 검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민족운동 세력은 새로운 방법과 조직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정세 변화는 민족 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6년 북벌은 조선 정세에 영향을 미쳤고, 만주와 몽골 지역에 대한 일본의 특수이익에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민족운동 세력은 1920년대 후반 중국과 일본의 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였습니다. 1926년 최린과 천도교 신파의 대두는 자치운동 세력이 대두되었고, 그들의 활동은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세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흐름은 1927년에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5년 민족 분열에 대응하여 민족운동 세력은 기독교, 천도교, 언론 등에서 주로 형성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중심으로 한 언론계와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23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계열도 민족 협동전선론을 논의하며 활동했습니다. 1926년에는 정우회가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를 선언하며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합이 강화되었습니다. 1926년 12월, 조선일보, 흥업구락부, 천도교 구파, 서북지역 기독교 세력, 조선공산당 계열 등이 참여하여 신간회를 결성했습니다. 출범 1년 만에 1928년 12월에 지회 수 143개, 회원 2만 명에 달하는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1927년 5월에는 여성운동계의 근우회가 신간회의 자매조직으로 출범했습니다. 1927년 4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정세의 변동에 따라 신간회 주도 세력과 참여 세력은 변화했습니다. 이는 민족운동의 정치적 지형 변동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신간회는 꾸준한 활동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1928년과 1929년에 연이어 신간회의 정기대회가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회와 본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조선일보 계열은 신간회에서 퇴거하게 되었습니다. 정기대회를 열 수 없게 된 신간회는 대신 1929년 6월에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허헌이 집행위원장으로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일제의 탄압도 강화되었는데, 이는 민중대회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44명의 신간회 회원이 검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앙조직은 허헌에서 김병로로 인도되며, 1930년대에 학생운동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간회의 지회 설립은 지역 활동가들이 주도한 노동, 농민, 청년, 사상운동에 기반하며, 각 지역의 운동단체를 조직적 기반으로 활용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신간회 창립 이후, 청년, 여성, 노동, 농민단체 등 전국에서는 신간회를 지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지회는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주제는 신간회의 필요성, 미신 타파, 조혼 금지, 금연과 아편 흡연 추방, 매춘과 풍기 문제 등이었습니다. 계몽운동 외에도 생존권 수호 운동으로 소비조합 설치, 협동조합 운동, 노동자와 농민 본위의 금융기관 설치 등이 주장되었습니다. 1929년 12월의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는 타격을 입었지만, 회원 수는 증가했습니다. 이후 김병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행부가 성립되면서 신간회 노선이 온건화되었고, 개인가입제를 단체가입제로 변경하여 활동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따라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하면서 내부의 불신과 회의가 더 깊어졌고, 사회주의 진영도 협동전선 방침을 폐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모색했습니다. 1931년 5월 16일 전국대회에서는 신간회 '해소안'이 통과되어 결국 신간회는 해체되었습니다. 신간회는 합법적 영역에서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목표로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정치투쟁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신간회는 합법적인 활동 영역을 통해 많은 민중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압력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지도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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