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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갑신정변(1884)

by 아이비ivy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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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0월 17일(음력),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피신하며 민씨 척족을 처벌했고, 10월 19일(음력)에는 중국 간섭 배제와 함께 다양한 개혁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갑신의거' 또는 '삼일천하'로 불리며,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조선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이 1876년 개항 이후 국제 사회에 참여하면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는 기존의 조공 책봉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했고, 이러한 변화는 큰 위기의식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과 극복 방안 중 하나로 개화사상이 등장했습니다. 개항 전후에는 개항을 반대하는 여론이 강했으며,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는 최익현과 같은 인물들이 이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1880년 제2차 수신사 파견을 통해 대일·대미 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고종은 개화 세력과 함께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1882년 제2차 수신사 파견과 이후 개화 세력의 부상을 통해 개혁은 가속화되었습니다. 내아문을 통해 국가의 재정·군사 업무를 맡고 외교·통상에 대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고, 이를 주도한 개화파는 정부 내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간의 갈등은 여전하며, 외교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고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며, 1882년에는 내아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육조 등의 이원적 체제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내아문은 독판과 협판에 의해 운영되어 외교 정책은 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간의 분화가 나타나면서 개화당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임오군란 이전에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대부분 과거를 거쳐 입문한 문인들이었습니다. 김옥균, 홍식은 187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서광범과 서재필은 1880년 이후 과거를 거쳐 관직을 받았습니다. 박영효는 같은 해에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홍문관과 사헌부에서 종사하였고, 홍영식은 조사시찰단으로서 일본을 방문하고, 김옥균은 개인적으로 6개월여 동안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외교와 정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수신사 파견, 조사시찰단의 활동 등을 통해 외교적 경험을 쌓았으며, 미국을 방문한 일행은 서구의 근대 문물을 경험했습니다. 김옥균은 차관 도입을 위한 외교활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내아문과 외아문, 승정원, 육조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내아문에서는 홍영식이 개화 정책을 총괄하고, 외아문에서는 김옥균과 홍영식이 외교를 총괄했습니다. 또한 육조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박영효는 왕실의 부마였기 때문에 관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군사력을 이용해 조선에 강한 개입을 하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로 경제적 침탈을 시도했습니다. 개화당은 독립을 목표로 삼아 청의 압력을 피하려 했고, 김옥균은 독립이 근대화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1882년 후반에는 청과의 관계와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내부 분화가 나타났으며, 친청파와의 정치 갈등이 심화하였습니다.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반청 의식은 뚜렷했지만, 서구와 일본의 침략적 의도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개화파는 서구와 일본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정변 당시에는 일본과 서구를 침략자보다는 협조와 이용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갑신정변 계획은 여러 견해가 있으나, 주로 1884년 6월경을 정변을 구체화 계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침략적인 청의 입장에 맞서 독립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개화당은 청과의 관계, 일본 및 서구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청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1884년 10월 17일부터 10월 19일까지 이어진 갑신정변은 청의 영향을 배제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한 개화당의 노력이 반영된 것으로, 일본과 서구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청의 간섭을 피하려 했습니다. 정변은 국내 정치세력의 갈등과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이뤄졌으며, 일본과의 협력에 의존했던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과의 협력은 정변을 계획하면서 시작되었고, 정변 주도 세력은 일본과 서구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정변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국제적인 상황과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일본 공사와의 협조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정변은 청의 군대와의 충돌로 인해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며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에는 개화파 세력의 위축과 외부 간섭에 의해 개화 정책이 중단되었으며, 정변 주도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처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며, 국내 정치세력과 국제적인 영향이 어우러진 복잡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갑신정변은 외세 의존, 취약한 권력 기반, 권력 목표와 사회 요구의 불일치 등 다양한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외부 도움을 받아 청군의 개입을 막았지만, 이는 민중의 반감을 샀고, 개화당의 세력이 취약하며 고종의 지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권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정변이 추구한 '독립'과 '개화'는 국민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고, 정책 목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정령 발표는 국민과의 갈등을 촉발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요인이 결합하여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로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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