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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동학농민운동(1894)

by 아이비ivy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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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또는 동학 난은 1894년에 일어난 농민 무장봉기로, 고부 봉기(1차), 전주성 봉기(2차), 전주·광주 궐기(3차) 등으로 나뉩니다. 동학농민군은 부패와 불만, 조선 양반의 탐학 등으로 인해 일어났으며, 동학농민군 일부는 흥선대원군과 연합하여 내정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전봉준은 대원군과 협력하여 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일부 농민은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도 대원군의 섭정까지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김개남은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거부하고 자체적인 행동을 했으며, 최시형과 손병희 등은 남접의 거병에 호응하지 않다가 3차 봉기 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 혁명으로 발전하며,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체결되어 결국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에 고부군에 부임한 조병갑 군수가 무리한 세금과 불공평한 처우 등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을 샀던 일에서 시작합니다. 농민들은 조병갑의 약탈과 억압에 반발하여 전봉준을 중심으로 군수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실패하고, 이에 농민들은 동학도와 결탁하여 한성으로 나가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에 반대하는 상소를 제출했습니다. 또한 1893년 초에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 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원군은 동학도들과 협력하여 명성황후를 처단하고 이준용을 추대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동학도들은 대원군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까지 동학도와 농민군의 상소로 일부 고관들이 파직되면서 사태는 더 악화하였고, 조병갑은 전봉준과 일가를 잡아들여 죽게 했습니다. 조병갑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이고, 갖가지 죄명을 만들어 벌금을 부과하며 부패한 행태를 이어 나갔습니다. 농민들은 세금 인상과 학정의 압박에 더 큰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1893년 11월과 12월에 두 차례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농민들은 결국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무기와 화약을 준비하였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원군은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하고 교섭을 시도했으며, 동학교도, 농민들 외에도 양반, 지식인, 불교 승려 등이 가담하는 대규모 봉기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봉기는 동학농민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민 씨 척족 정권을 비판하고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며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농민들의 봉기로 전개되었습니다. 제1차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5일에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를 점령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날 밤에 전봉준은 최경선과 함께 3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말목장터에 도착했고, 농민 지도부는 사발통문을 돌려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고 전주까지 함락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점령하며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억울하게 빼앗긴 세곡들을 창고에서 찾아내 농민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최초의 전투에서 전봉준, 손화중, 서장옥 등이 지도하는 농민들이 연합하여 싸웠으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후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대응과 최시형의 거병 반대로 인해 해산되었습니다. 조병갑 생포 작전은 실패하였고,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이용태를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습니다. 조정은 동학 농민군의 대표들과 면담하여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였고,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하였습니다. 제2차 동학농민운동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면서, 조선 정부가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발생한 농민 봉기입니다. 이 차례에는 흥선대원군과 연계된 주장들이 있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하거나, 봉기의 적절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상백의 주장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중 한 명인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송희옥을 통해 전봉준에게 밀지를 보내 재봉기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또한 김개남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해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협력했다고 합니다. 이에 전봉준과 김개남은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해산된 후, 전봉준은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집강소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양반 세력이 강한 나주, 남원, 운봉 등 몇 군에는 설치되지 못했습니다. 전봉준은 나주를 접수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고, 나주 목사를 설득하여 동학교도들을 석방하고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동학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게 되었습니다. 1894년 9월,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의 띄워 궐기를 호소했습니다. 이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의 병력이었습니다. 동학 농민군의 흥선대원군과의 일부 내통이 알려지면서 민 씨 내각은 농민군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과 청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 등은 전라북도 전주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번에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외세, 일본과의 항쟁이 주요 목표로 세워진 '제3차 동학농민운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민군은 조일 연합군을 상대로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이고 패배했습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김개남은 청주전투에서 패한 뒤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농민군은 패배하고 후퇴했습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에는 남접과 북접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농민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었고, 무기도 원시적이어서 일본군과 관군과의 상대로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농민군은 10월 중순에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 격전을 전개했지만, 패퇴하였고, 11월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12월 10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후퇴하였고, 전봉준은 서울로 잠입한 일본과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민간인까지 포함한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다가 정부군을 피해 순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상금을 주겠다는 포고문을 내걸었고, 전봉준은 12월 28일에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의 동학에 기반한 민중항쟁으로, 농민 중심의 운동으로써 반봉건적이고 반외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나 외세에 대항할 병력 부족, 지주 등의 저항 과소평가, 내부 의견 불일치 등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동학군은 일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정체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인해 농민층은 후기 의병에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내정개혁 요구는 부분적으로 반영되었지만, 토지개혁 부재로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운동은 민중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3·1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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